민족대표 48인으로 3·1 운동 주도해 옥고 치른 수원 만세운동의 중심

3월은 시작을 알리는 달이다. 학교는 새로운 학생을 맞이하고, 농부는 씨를 뿌리기 전 논밭을 갈아야 하는 시기다. ‘빼앗긴 들녘에 봄이 오기’를 기다렸던 일제강점기, 국권을 탈환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내어놓았던 독립운동가에게도 3월은 비슷한 의미였을 것이다. 

1919년 3월1일 뿌려진 독립의 씨앗은 1945년 8월15일 열매를 맺기까지 수많은 의인들의 희생을 양분으로 자랐다.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수원과 이천, 충남지역의 독립운동 조직 활동을 주도한다.

수원지역 교육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친 김세환(金世煥, 1889~1945)이 3·1운동 101주년을 맞는 2020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수원에서 태어나고 자라 수원을 기반으로 독립운동과 민족운동 및 교육에 헌신한 그의 발자취를 조명해본다.
 
김세환은 1889년 11월18일 수원시 남수동 242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소년기는 수원에 기독교가 들어오는 변화의 시점이었다. 1901년 성안 보시동에 감리교회(북수동 수원 종로교회)가 들어왔는데, 소년 김세환은 집에서 가까운 이 교회를 출입하며 교회를 통해 기독교 신앙 뿐 아니라 교육가로서 또는 독립운동가로서 꿈을 키웠다.
 
이후 서울에 있는 관립 외국어학교로 진학했던 김세환은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대학에서 신학문을 접한 뒤 수원으로 돌아와 상업강습소(수원중·고교) 직조 감독관으로 일하는 동시에 삼일여학교(매향중교) 학생들을 가르치며 교직에 몸담았다.
 
뿐만 아니라 YMCA 간사였던 박희도를 통해 3·1운동 준비 모임에 참가해 충남지역과 수원지역의 조직 책임자로 중추적 활동을 했다. 지역 교회의 주요 인사를 만나 민족대표로 서명하도록 승낙을 받은 그는 서울로 도착하는 시간이 늦어져 독립선언서에 기명은 하지 못했다.

1년여의 옥고를 치른 김세환은 1920년 10월 석방돼 수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교사로는 복직하지 못하고 시내에서 곡물상을 운영하며 사회활동과 지역 유지로서의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27년 신간회에 참여하면서 수원지회장과 수원체육회장을 역임하는 등 민족주의 운동을 지속했다.
 
이후 김세환은 화성학원과 삼일학교 및 종로교회를 근거로 활동하며 후학양성과 수원지역 교육계를 위해 헌신했다. 그러다 1945년 해방을 맞고 한 달 남짓 시간이 흐른 9월16일 자택에서 운명했다. 그는 국립묘지에 안장됐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고, 3·1운동 101주년을 맞는 2020년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수원박물관 관계자는 “수원 출신의 독립운동가가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것은 최초”라며 “일제의 심한 감시로 적극적인 독립운동은 어려웠지만 민족과 교육운동에 집중하며 후진을 양성한 김세환 선생의 업적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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